| 군인가족 생활수기 우수상(국방일보 주관)
2002년은 월드컵의 열기로 뜨거웠던 시기였고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됐던 한 해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나에게는 또 다른 가슴 아픈 사연, 아니 가슴 아프다 못해 시커멓게 타버린 해였다. 내 남편이 신체의 일부인 왼쪽 다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해 7월 6일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가 점점 식어갈 무렵이었다.남편은 당시 ○○부대 포대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태풍 ‘라마순’이 한반도에 상륙해 북상 중이었으며 남편은 당시 태풍 대비로 부대에서 작전 순찰 중이었다. 저녁 8시쯤 어둠은 부대에 짙게 깔리고 비바람은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으며, 남편은 부대 한 지역을 순찰하던 중 세차게 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현장을 즉시 살폈다.
빗물이 여러 곳에서 한 곳으로 모여 울타리를 통해 부대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지점은 이미 지뢰제거 작업을 실시했지만, 땅속 깊이 매몰돼 있던 지뢰가 아직 남아 있을 수 있는 위험한 지점이었다. 그대로 방치하면 자칫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작전 운영에 차질이 생기고, 남아 있던 지뢰가 유실돼 인명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지휘관으로서 그 장면을 목격하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옆에는 같이 순찰하던 부하가 있었지만 만약의 위험에 대비해 지휘관인 남편이 직접 부대 울타리 사이로 들어갔다. 남편은 부하로부터 받은 비닐과 샌드백을 이용해 배수로 작업에 한참 열중했다. 한 절반쯤 작업을 했을까! 왼발이 배수로 깊이 빠져드는 느낌이 드는 순간 ‘쾅’ 하는 폭음과 함께 남편의 몸은 공중에 떴다가 떨어지면서 정신을 잠시 잃었다.
다시 눈을 떠 보니 전투화를 신은 남편의 왼쪽 다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고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다. 순간 남편 눈앞에 부모님과 나, 그리고 두 딸아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순간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때부터 남편의 살기 위한 전쟁 아닌 전쟁이 시작됐다.
피는 하염없이 흘렀고 태풍으로 인한 비바람과 어두움, 그리고 14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어 빠른 시간 내 병원까지 이동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남편은 우선 입고 있던 우의와 허리띠를 이용해 왼쪽 다리를 동여매 지혈을 했다. 잠시 후 남편은 부대원에 의해 울타리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두 시간여 만에 국군강릉병원에 도착했다.
혹시나 남편이 잘못됐을까 봐 택시를 타고 가면서도 하염없이 눈물을 훔쳤고 대관령을 넘어 국군강릉병원까지 가는 길은 앞이 거의 안 보일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어 가는 거리가 더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해 응급실로 곧장 달려 갔으나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잘못돼 영안실로 옮겨 간 줄로 알았으나 상처가 너무 심해 아산병원으로 옮겼다고 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아산병원으로 가 남편을 본 것이다.나는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괜찮아! 살아 있어 줘 고마워!”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남편은 “어떻게 알고 왔어? 미안해!” 하며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으려 했다.
남편의 모습은 전투복은 벗겨지고 왼쪽 다리는 붕대로 칭칭 감겨져 있었고 몸은 피를 많이 흘렸는지 누렇게 보였다. 손과 얼굴, 머리 여기저기에 흙이 묻어 있어 손수건을 꺼내 닦아 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산병원에서 몇 가지 기본적인 검사를 했으나 환자 상태로 봐서 병원에서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남편은 또다시 앰뷸런스에 실려 분당에 있는 수도병원으로 향해야만 했다. 빨리 어떤 처방이 있어야 했는데 그때 내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강릉에서 서울까지 가는 시간 역시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으며 가는 내내 나는 남편이 정신을 잃지 않도록 손을 꼭 잡고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러나 이동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고 남편이 계속 통증을 호소해 이 상태로 수도병원까지 도저히 갈 수 없어 함께 탑승한 군의관이 중간에 ○○비행단에 들어가 진통제 몇 대를 맞고 다시 수도병원으로 향했고 다음날 새벽 4시쯤에야 도착해 다시 기본적인 검사를 했다. 병원에서 회의를 거쳐 남편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결정 통보와 함께 8시쯤 남편은 수술실로 향했다.
한 4시간이 지났을까? 수술실 문이 열리더니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남편은 아직 수면상태에 있었고 왼쪽 다리는 절단돼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절망 그 자체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누구라도 붙들고 남편의 다리를 달라고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칭칭 감긴 남편의 다리를 만지며 말없이 한동안 눈물만 흘렸다.
병실로 옮긴 후 30분 정도 지나서 남편은 눈을 떴고 자신의 다리를 보더니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남편은 나의 손을 꼭 잡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하며 나를 달래 주었다.수술 후 10여 일이 지났을 무렵 군의관으로부터 절단된 수술 부위가 부작용이 생겨 또다시 추가 수술로 조금 더 절단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남편은 또다시 수술실로 향했다. 처음 수술 때는 전신마취를 했지만 이번에는 하반신 마취로 2시간여 만에 수술을 끝냈다. 나는 또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남편 앞에서는 슬픈 내색도, 마음 아픈 이야기도, 그리고 눈물도 보이지 않고 항상 밝은 표정만 보이기로 …. 이것이 나를 위한 길이기도 하지만 더욱 남편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술 후 보름 정도 지났을까. 남편이 병실에만 있어 너무 갑갑해할까 봐 나는 남편을 휠체어에 태워 병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8월 초여름의 날씨는 찌는 듯했으나 모처럼 만의 바깥 공기와 경치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기분은 한껏 좋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병실에서 나온 김에 병원 주변을 한바퀴 돌기 위해 휠체어를 밀었다.
수도병원은 산을 깎아 병원을 지었기 때문에 경사가 있어 휠체어를 민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고 거리도 만만치 않아 15분 정도 걸렸지만 나는 힘든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어느 누구보다 제일 힘든 사람은 남편이기 때문이다. 매일 나는 남편의 기분전환을 위해 오전 오후 한 번씩 매일 두 번 남편을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 주변을 돌았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까. 나의 무릎이 아파왔고 병원 진료를 받아 보니 관절염이라고 했다. 무리하게 휠체어를 밀고 다닌 결과였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횟수만 줄였을 뿐 약을 먹어가면서 남편의 기분전환을 위해 계속 병원 주변을 돌았다.시간은 흘러 병원에도 가을이 ?O아 왔다.
나의 적극적인 간호와 남편의 재활의지 덕분에 수술 부위도 빨리 아물어 갔고 정신적인 건강도 되찾을 수 있었다. 상처가 아물자 물리치료가 시작됐다. 물리치료를 하는 기간에도 나는 매일 치료실까지 휠체어를 밀고 다니면서 불편한 남편의 한쪽 다리 역할을 해 주었고 한번이라도 더 다리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의 왼쪽 다리를 대신할 의족을 맞추기 위한 사전 작업이 시작됐다.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의족을 착용하고 잘 보행할 수 있을까. 남편이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운동은 어디까지 가능할지,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 등등…. 기다리던 의족이 나왔다. 남편은 처음 신어 보는 의족이라 어색하기도 했고 불편한 점도 많아 보였다.
처음 걸음마 단계부터 걷는 연습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걸음 연습을 할 때에도 나는 휠체어를 끌고 항상 따라 다녔으며 걷는 자세 교정과 요령을 피우거나 쉬려고 하면 혹독하게 나무랐다. 그 덕분에 의족은 남편 왼쪽 다리처럼 돼 갔고 휠체어는 필요없게 됐으며, 휠체어를 이용해 돌던 병원 주변을 목발로만 걸을 수 있었고 정상인 걸음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걸음 연습은 계속됐다.
병원에 입원한 지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남편은 현역에 계속 복무하길 원했고 공군 전역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남편의 의사가 받아들여져 ‘신체유공 장애군인’으로 복직돼 푸른 제복을 입을 수 있었다. 공군에서는 남편이 첫 번째 사례인 것으로 알고 있다. 모든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다시 군복을 입기까지 6개월여 동안 재활 의지를 가지고 나를 항상 믿고 따라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수도병원에서 치료와 재활 끝에 남편은 2003년 2월 현역으로 다시 복직했으며, 복직 후에도 남편의 몸에 의족을 적응시키기 위한 나의 재활치료 의지는 계속됐다.저녁식사 후에는 꼭 남편과 함께 아파트 주변을 산책이나 가벼운 조깅으로 절단된 다리를 단련시켰고, 2004년도에는 남편, 두 딸아이와 함께 계룡산 천황봉(845m)을 오르기도 했다.
또 같은 해 9월에 국방일보에서 주최하는 ‘전우마라톤 대회’ 5km 코스에 남편과 같이 뛰기도 했다.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사람은 가까운 거리이겠지만 장애를 갖고 있는 남편으로선 5km를 한발 한발 뛰는 모습은 무척 힘들고 애처러워 보였다. 나는 남편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짧지 않은 37분을 뛰는 동안 흘리는 땀을 닦아 주며 힘과 용기를 주었다.
완주의 기쁨은 정상인들보다 몇 배나 더 컸으며 나 역시 행복의 웃음을 남편에게 안겨 줬다.인간은 누구라도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다고 했던가. 장애인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남편 또한 장애를 갖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푸른 제복을 입고 있는 군생활 동안 말이다.길을 걷다가 장애인을 만나면 ‘참 안 됐구나’ 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장애는 나와 상관 없는 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남편은 장애인이 됐다. 그러나 현재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남편보다 더한 장애를 갖고 생활하는 사람에 비하면 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의 남편을 무척 사랑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군인 가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나이기에 군인 남편의 아내로서 더욱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김미선 공군전투발전단 박철현 소령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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