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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6ㆍ25전쟁을 다시 생각한다. 조회수 8583
작성자 4 작성일 2004.05.27
6·25전쟁을 다시 생각한다 이 종 학(공사 3기) (전 국방대학원 교수·명예 군사학 박사) 일찍이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 수상은,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경험에서 배우지만, 현명한 자는 타인의 경험에서 배운다”고 했는데, 우리의 민족사상 최대의 비극인 동족상잔의 전쟁을 체험하고도, ‘자신의 경험에서도 배우지 못하는 자’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미치자, 이것만을 면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서둘러 『6·25전쟁사-그 진실과 교훈을 찾아서-』(2001)를 발간했다. 이제 전쟁을 체험한지 반세기가 지났고 또한 소련의 비밀 외교문서가 공개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정책·전략·전술에 대해 잘했다·못했다의 價値論이 들어있는 戰爭史를 꾸며 후손들의 교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 지면에서는 필자는 간략하게 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는가 하는 원인과 한국군의 初戰敗因을 究明하는 데 역점을 두고자 한다. ● 스탈린·金日成·毛澤東의 南侵謀議 우리나라 史學界에서도 지명도가 높은 미국 시카고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제1·2권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1981, 1990)을 발표했다. 그의 저서, 제2권의 제18장은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나」라는 제목이며, 거기의 결론은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나? 이 의문에는 답할 수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어처구니가 없는 결론이다. 김일성과 그의 대표단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소련에 체재하면서 스탈린을 세 번 만나 결국 남침의 승인과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도 교시를 받았는데, 이것은 결정적 史料이다. “스탈린은 첫째, 미국이 결국 개입할 것인지 아닌지를 고려해야 하고, 둘째, 조선의 해방은 중국 지도부가 이를 찬성할 때만 개시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다음은 구체적인 공격계획이 수립되어야 하며, 기본적으로 그것은 3단계로 구성되어야 한다. ① 38선에 인접한 특정 지역에 병력을 집중 배치한다. ② 북조선의 최고 권력집단이 새로운 평화통일 제안을 제시하며, 분명 이러한 제안들은 상대방에 의해 거부될 것임. ③ 북조선측이 공격하고 남측이 반격한 후에 전선이 확대할 기회가 마련될 것이다. 전쟁은 速戰速決을 지향해야 한다. 남한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북조선은 소련이 전쟁에 직접 참여해 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는 재차 毛澤東과 상의하도록 金日成에게 촉구했다. 북조선군의 동원을 1950년 여름까지 완료하고 이 때까지 소련 고문관들의 도움을 받아 조선군 참모들이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승인한 날짜는 1950년 4월 10일이며, 이에 앞서 소련의 총참모부는 남침용으로 작성한 「三日作戰」의 전략계획을 이미 작성했다. 그리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작전계획 수립가인 바실리에프 중장은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승인하기 전인 1950년 2월 23일 이전에 평양에 와서 남침용의 작전계획을 5월 27일에 완성했던 것이다. 한편 김일성은 남침에 대한 毛澤東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스탈린의 전제조건 때문에 박헌영과 함께 5월 13일 北京에 가서 毛澤東을 만나 15일에 동의를 얻었다. 1950년 6월, 남북한에는 ① 현대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무기와 장비 등의 생산 능력, ② 1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는 전략·작전계획 수립가, ③ 1개 사단 이상 지휘한 實戰體驗者의 세 가지 不在로 인해, 북한이 주장하는 「民族解放戰爭」이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승인을 얻고 또 毛澤東의 동의를 얻어 6·25전쟁을 일으켰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남침에 대한 구체적 지침에 따라 開戰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3일간 지체하고 말았는데, 이것은 한국군과 미군에 있어서는 숨을 돌리는 시간적 여유를 주었고, 인민군에게는 재앙의 씨가 되었다. 1950년 7월 1일 평양주재 소련대사에게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경고 발언을 했다. “동무는 북조선 군사 당국의 계획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전혀 보고하지 않고 있다. 북조선 군사 당국은 전진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가? 또는 진격을 멈추기로 결정하였는가? 우리의 견해에 의하면, 진격은 의심할 나위 없이 계속되어야 하며, 남조선이 빨리 해방되면 될 수록 그만치 더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 한국군 초전의 패인과 북한의 간첩들 한국군은 개전 3일만에 수도 서울이 점령되고 패배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첩보전일 것이다. 평양주재 소련 대리대사인 툰킨은 1949년 9월 12일 김일성·박헌영과의 논의한 내용을 모스크바에 상세히 보고하는 가운데, “북조선이 남조선군의 모든 부대 내에 첩보원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 점에 대해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군의 월북·반란사건, 그리고 초기 전투의 주요한 패인은 여기서 유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蔡秉德 육군 총참모장의 부관 나최광 중위는 한국군의 軍籍에도 없는 자이다. 총참모장 집의 식모 말에 의하면, 개전 후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지 않고 집을 지키다 자살했다고 말했지만, 아마도 인민군으로 원대 복귀했으리라 추정한다. 필자는 1960년대 후반, 공군사관학교 교수부 군사학과장(중령)으로 있을 때,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文熙奭 위원장을 방문하여 蔡秉德 총참모장의 모순된 여러 조치, 즉 ① 방어진지 건설 건의의 묵살, ② 1950년 6월 10일의 군 수뇌·사단장의 인사이동, ③ 비상경계를 6월 23일에 해제하여 주말의 외출·외박의 실시, ④ 對戰車砲를 수리 명목으로 회수, ⑤ 전방 사단의 예속 변경, ⑥ 6월 24·25일의 파티 등인데, 아무리 연구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니, 文 위원장은 필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2차의 심야 파티는 國一館에서 25일 오전 2시까지 진행되었으며, 그 비용은 鄭國殷이 지불했고, 더 큰 사건이 있지만” 하더니 말을 멈추고 말았다. 鄭國殷(당시 연합신문 주필)은 1953년 8월 31일 육군 특무대에 의해 체포되었고, 동년 12월 5일 육군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언도를 받아, 1954년 2월 19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필자는 30여년 간 蔡秉德·鄭國殷의 행적을 찾으려 애썼으며, 이제 고희의 중반을 넘어서게 되었기에, 금년 2월 14일 육군본부 법무감실 고등검찰부 기록실장 앞으로 공문을 내어 정국은의 재판기록 열람을 신청했다. 2월 26일자 육군 참모총장(전결:고등검찰부장) 명의로 “정국은에 대하여 판결문 색인부를 열람한 바 관련 자료가 없음을 통지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 문제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과제로 남겨두게 되었음을 밝히고, 앞으로도 계속 究明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6·25전쟁은 3년 1개월에 걸쳐, 인적 피해(전사·부상, 민간인 피살 및 행방불명 등)는 남북한의 2,256,000여명, 중공군의 972,600여명, 유엔군의 545,908명이 있으며, 전 국토는 철저히 황폐해졌고, 온 민족이 헐벗고 굶주리게 된 分斷의 固定化, 상호간의 불신과 증오, 그리고 민족사상 최대의 비극을 초래한 데 대한 책임은 대단히 중대하다. 오늘의 한반도 군사정세는 마치 6·25전쟁 직전을 방불케 하는 듯한 생각이 드는 것은 다만 필자 혼자만의 기우일까? 요즘 남북한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추세는 화해·평화로 가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변화는 전술적 변화이지, 결코 진정한 전략적 변화는 아닌 듯 하다. 그 이유는 기아선상에서 헤매는 북한 주민들에게 국제사회에서 거지처럼 식량을 구걸하면서도, ‘강성 대국’을 외치면서 핵무기·탄도 미사일을 개발하고, 과대한 110여만의 병력을 보유하면서 그 주력을 휴전선에 배치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6·25전쟁의 재발을 막을 수 있는 만반의 임전태세를 언제나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전쟁억제의 기본 원칙이며, 그래야 평화적 통일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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