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걸 (예 대령, 공사32기, 전 공군본부 정훈공보실장) 1950년 6월 말 일본 규슈의 미 극동 공군 이타즈케(지금의 후쿠오카) 비행기지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 조종사들은 이 비가 야속했다. 비행훈련을 할 수 없는 날씨였다. 지금 국군은 밀리고, 전투기 없는 공군은 훈련기에서 손으로 폭탄을 투하했다. 부모·형제자매들은 피란길에 나서고, 국토에 포성이 가득했다. 마음이 급한 조종사들은 출발한 지 1주일이 지난 7월 2일, 훈련을 끝내기로 결심한다. 미 공군은 극히 짧은 기간이지만, 이들이 이미 중국·일본에서 전투기로 참전 경험이 있고, 한국의 절박한 상황을 이해해서 복귀를 인정했다. 처음 출발했던 수원기지가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 대구기지에 착륙했으니, 그 심정이 또한 오죽했을까. 활주로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정비사들은 전투기 꼬리에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K’를, 날개에는 태극마크를 그려 넣었다. 우리는 당시 L-4, 5 연락기와 T-6 훈련기밖에 없었고, 북한은 소련제 전투기 60대를 포함해 220여 대 항공기가 있었다. 비행단장 이근석 대령을 비롯한 김영환 중령(강릉기지 초대 전대장), 김신 중령(6대 참모총장, 백범의 차남), 김성룡 중령(10대 참모총장) 등 10명이 일본에서 F-51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몰고 대한해협을 건너온, 건군 이후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들이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다음 날 7월 3일 첫 출격 임무는 육군의 요청에 따라 동해안 묵호·삼척지구와 충주에서 대구로 남하하는 북한 지상군에 대한 공격이었다. 이튿날 4일의 출격은 서울·안양·시흥 상공에서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이날 미군 조종사는 다쳤고, 이근석 대령은 전투 중 적의 대공 포탄에 피격되자, 적진을 향해 장렬히 산화했다. 우리 공군의 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우리 국군의 희생은 컸다. 이 중 공군 조종사들의 희생이 만만치 않았다. 김정렬 참모총장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비행기지를 제주도로, 다시 경남 사천으로 이동했다. 1951년 10월에는 강원도 강릉기지로 전진해 본격적인 전투 출격을 개시한다. 그동안 미 공군의 비행지휘를 받던 우리 공군이, 임무를 부여받으면 목표 타격에 대한 비행계획을 수립하고 단독으로 출격 능력을 갖췄다는 의미다. 강릉기지 무장사들은 폭탄을 달고 로켓탄을 달았다. 정비사들은 기체를 조이고 기름을 가득 채웠다. 그리하여 100회 출격, 200회 출격, 1000회 출격을 실행했다. 6·25 항공전사에 영원히 빛날, ‘평양 대폭격 작전’, 평양 동쪽 북한군 군수물자 요충지인 ‘승호리 철교 차단 작전’, 강원도 고성 ‘351고지 공지 합동작전’ 등 3대 작전의 승리를 일궈냈다. 이때 조종사들이 착용하기 시작한 ‘빨간 마후라’는 투혼과 신념의 징표가 됐고, 출격 첫날인 7월 3일은 ‘조종사의 날’이 됐으며, 1957년 퇴역한 무스탕 전투기는 문화재 제6호가 됐다. 포성은 멈췄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F-51 무스탕 전투기의 소임이 F-35 스텔스 전투기로 이어졌다. 패트리어트 방공미사일, 조기경보통제기, 공중급유기도 운용하는 막강 공군이 됐다.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지키는 우리 공군이 믿음직스럽고, 내가 공군이었음이 자랑스럽다. (* 본 내용은 2019.6.21 국방일보 보도내용으로 관심있는 회원 여러분의 일독을 권장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