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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최명상 장군의 병영칼럼(2) |
조회수 |
78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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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4 |
작성일 |
2005.0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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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兵士의 편지
나는 얼마 전 한 병사의 편지를 받았다. 이른바 신세대 병사다. 나의 ‘새로운 국제 질서와 한반도 안보’라는 강연을 듣고 보내온 편지다. 강의 내용보다 가슴 뭉클한 대목이 있어 우리 장병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장군님! 처음에 안보 강연회라기에 솔직히 짜증스러웠습니다. 어쩔수 없이 강연장에 들어가 졸려고 생각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곤한데 잠이나 한숨 자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장군님의 말씀이 제 귀에 쏙쏙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현상을 거부하고 쉬기를 원했지만 귀가 확 트일 정도로 들려오는 어떤 신비한 힘에 굴복해 버렸습니다.
원래 제가 외교·국제 관계 쪽에 관심이 좀 있어 강연이 귀에 들어왔을지도 모르지만 장군님의 해박한 지식과 해설, 그리고 적절한 비판이 제가 빠져든 더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 강연으로 인해 저의 ‘꿈과 비전’이 그쪽으로 완전히 굳어졌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이제야 확실히 알게 돼 무척 기쁩니다. 이런 결심을 갖게 된 계기가 그 강연 때문임을 말씀드리며 감사하고 있습니다.(중략)
최근 우리나라에서 반미 시위가 늘고 미국을 적대시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한·미동맹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넘어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장군님의 강연 덕분에 불안한 국제 정세에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에 대해 확답을 얻게 됐습니다. 최근 극심한 반미 여론으로 저의 생각을 굳게 지키기가 힘들었습니다만 이번 기회로 확실히 자리잡게 돼 감사히 생각합니다.
또 다른 감사할 일이 있는데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우리나라에 대한 사랑을 갖게 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솔직히 말만 애국이었지 실질적으로는 우리나라에 대한 사랑이 정체성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선진국의 시민권을 얻어 이 나라를 등진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했으며 그런 나라에 막연한 동경을 갖고 우리나라를 비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말씀으로 정말 큰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 내 조국과 내 민족이 먼저구나. 나를 낳고 길러 준 이 조국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며, 조국의 번영과 발전에 이바지함으로써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저는 솔직히 탑골 공원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이나 프랑스의 시민 혁명 따위에만 관심을 가졌지 우리나라의 3·1운동, 기미독립선언문 등은 경원시한 것을 부끄럽지만 고백하는 바입니다.
이제는 달라지려고 합니다 우선 지금껏 등한시했던 우리 역사부터 이 나라 안의 모든 일에 관심을 갖고 살아갈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해 세계 평화를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며 우리 민족의 번영을 위해, 인류 발전을 위해 이바지하겠습니다. 이런 변화는 제 인생 자체에도, 제 꿈을 성취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줄 것임이 분명합니다.
장군님! 방황하던 저의 꿈을 확고히 잡아 주시고 낙심해 있던 저에게 다시 달릴 수 있도록 열정을 부어 주신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뛰고 또 뛰어서 이 나라와 세계를 위해 살아가는 인격을 갖춘 인물이 되겠습니다. 그런 후에 장군님을 꼭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하략)〉
내가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다. 교육이 중요하다. 짧은 강연으로 한 신세대 병사의 국가관·인생관 확립에 도움을 줬다니 기쁘다. 이 청년의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최명상 前공군대학총장·소르본대 국제정치학 박사 genechoe@seoulairshow.com>
“운명아 비켜라 대한민국이 간다”
우리가 매일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살 수 없듯이 지금 세계 200여 개 나라는 국제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틈에 위치한 한반도는 더욱 그렇다. 국제질서는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돼 왔는가. 국제정치학에서 ‘국제관계의 본질은 전쟁’으로 정의하고 국제질서 변화를 크게 네 가지로 나눠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최초의 국제질서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보고 있다. 나폴레옹의 전승은 무력에 의한 유럽 점령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혁명정신인 자유·평등·박애 사상을 전파함으로써 세계적 변혁을 가져왔다. 그러나 러시아 침공으로 패배하자 영국·러시아·오스트리아 등 전승국들은 1815년 비엔나 회의에서 ‘유럽협조체제’라는 세계 최초의 국제질서를 형성했다. 당시 한반도는 곧 무너질 ‘유교권의 국제질서’에 홍경래 난과 천주교에 대한 을해박해가 있었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위세는 조선의 병인양요로까지 뻗쳤으나 1870년 보·불 전쟁으로 국제질서가 변화한다.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는 게르만 민족이 통일되지 않고는 프랑스에 설욕할 수 없다고 판단, 철(鐵)과 혈(血)로써 독일 통일을 추진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제자 몰트케는 세당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하는 대승을 거둔다. 비스마르크 재상은 빌헬름 1세를 황제로 통일독일제국을 선포하고 세력균형 원칙과 비밀동맹으로 세계 평화를 주도했다. ‘비스마르크 국제체제’를 이룬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또 다른 국제질서를 낳는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터키, 불가리아의 4개 동맹국과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 등 28개 연합국 등 무려 32개국이 싸운 세계적 전쟁이었다. 미국은 몬로주의로 참전을 꺼렸으나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미 상선이 침몰되자 참전해 승리하고 세계적 강국으로 부상했다. 토머스 윌슨 대통령은 1919년 ‘베르사유 국제체제’를 주도했다. 그는 민족 자결주의와 국제연맹을 제안했다. 일제 하의 우리 민족은 ‘기미독립선언’을 강행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불과 20년 만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패전 독일은 바이마르 민주공화국으로 전환했으나 경제난과 민심 혼란을 틈타 1933년 히틀러가 나치스당 정권을 수립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베르사유 국제질서를 무시했다. 재군비와 오스트리아 합병, 그리고 뮌헨협정으로 체코를 병합했다. 1939년 9월1일 폴란드를 침공했다.
한편 일본은 1910년 조선을 점령하고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들은 대동아공영권 건설이라는 미명 하에 아시아 전 지역을 침공했다. 마침내 1941년 12월7일 하와이 진주 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을 야기하고 미국의 참전을 초래했다. 실로 전 세계가 전쟁에 휘말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영국의 윈스턴 처칠·소련의 스탈린은 카이로회담·테헤란회담을 거쳐 1945년 2월 얄타회담을 통해 종전 후 국제질서를 결정했다. 미·소의 대결로 한반도는 분단되고 ‘얄타국제체제’는 ‘냉전국제체제’로 변했다. 냉전 체제는 한국전쟁을 야기했다. 한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 소련 붕괴로 ‘탈냉전 국제체제’가 되었으나 한반도는 아직도 냉전의 빙하로 남아 있다.
더이상 국제질서의 희생물이 돼서는 안 된다. 슬기롭게 국가 운명을 헤쳐 나가야 한다. 온 국민 단합으로 우리의 힘을 키우고 팍스 아메리카나와 조화를 이루며 평화와 통일, 민족 번영의 길을 개척할 때다. “운명아 비켜라 대한민국이 간다.”
<최명상 前공군대학 총장·소르본대 국제정치학 박사 genechoe@seoulairshow.com>
불후의 명작 ‘전쟁론’
1870년 보불(普佛) 전쟁시 프러시아의 몰트케 장군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를 세당 전투에서 생포하는 대승을 거둔다. 철도를 이용한 몰트케의 기동 전략이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그리하여 재상이던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를 황제로 통일 독일 제국을 선포한다. 나폴레옹 전쟁의 패배를 설욕하고 철(鐵)과 혈(血)로써 게르만 민족을 단합시킨 것이다.
통일 독일의 영웅이 된 몰트케 장군에게 기자들이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기 머리맡에는 항상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 성경, 그리고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있다고 했다. 호메로스와 성경은 알려졌어도 클라우제비츠는 생소했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는 이때부터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전쟁론’은 클라우제비츠가 갑자기 사망한 후 부인 마리에 의해 1832년 출판됐다. 그리고 출판된 지 40년 후에야 그의 훌륭한 제자 몰트케에 의해 세상에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아직도 ‘전쟁론’은 세계 각국어로 번역돼 근대 전쟁 최고의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마리는 서문에서 “이 저서가 나의 몇 줄의 글을 필요로 하는 것은 내가 끝없이 존경하고 사랑하던 남편이 온 정력을 쏟아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내 남편이 그렇게 빨리 불행하게 죽음의 손에 불려 간 것은 실로 나와 내 조국을 위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1780년 프러시아의 마그데부르크에서 예비역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나폴레옹 전투에 참가했다가 부상당하고 빌헬름 황제가 보불 연합 전선을 맺자 나폴레옹 휘하에 들어가기 싫어 대불(對佛) 항쟁을 위해 러시아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는 다방면에 다재다능했지만 자기의 사색을 전쟁과 군사과학 방면에 집중시켰다. 그것은 직업이 요청하는 의무이기도 했지만 국가 이익을 위해 지극히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록 군에서 승승장구 출세는 못해도 역사에 길이 빛나는 저서를 남기고 싶어 했다. 잠시 있다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따위의 책은 쓰고 싶지 않았다. 전쟁·군사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 번 이상 들여다볼 만한 책을 저술하고 싶었다.
그는 아우구스트 그나이제나우 장군에 의해 사관학교 교장에 부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몰트케는 사관생도였다. 그는 명성이나 허영 같은 이기적인 욕망에 관심이 없었다. 세상을 위해 진실로 유익한 일꾼이 되기를 소망했으며 신이 자기에게 베풀어 준 재능을 헛되이 사장해 버려서는 안 된다는 욕구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가 오래오래 읽혀서 전쟁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큰 이익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이러한 소망을 그의 부인이 부관이던 외첼 소령, 남동생 브륄 장군과 함께 전3권 8편으로 묶어 완성한 것이다. 위대한 장군과 현명한 부인에 의해 불후의 명작이 탄생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참군인의 길이며 내조가 아닐까. 독서의 계절을 맞아 일독을 권하고 싶다.
〈최명상 前공군대학총장·소르본대 국제정치학 박사 genechoe@seoulairshow.com〉
‘爲國獻身 軍人本分’
나는 공군대학 총장 시절 서울에서 대전으로 대학을 옮겼다. 대학을 옮기는 일은 많은 준비와 계획, 그리고 새로운 설계가 필요했다. 강의실·교수 연구실·학술회의실·도서관·강당·체육관·연병장·학생 장교 숙소 등을 현대화했다.
한 방에 6∼10명이 근무하던 교수들에게 일인일실(一人一室)의 연구실을 우선 배정했다. 6·25전쟁시 맹위를 떨친 항공기 F - 86과 T - 33을 학교 앞 광장에 세웠다. 최신예기 F - 16 모형도 비치했다.
대학 현판도 직접 썼다. 역사관도 꾸몄다. 새로운 장소로 옮김에 따라 장차 우리 군을 이끌어 갈 장교들에게 오래 기억될 상징물을 만들고 싶었다. 숙고 끝에 우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신 안중근 의사를 생각했다. 총장실 입구에 안의사의 휘호 중 ‘위국헌신(爲國獻身) 군인본분(軍人本分)’을 설치했다. 예산도 문제였지만 그분의 뜻을 고이 전하고 싶어 남산 기념관에서 직접 탁본을 하고 목판에 새겼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 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은 전쟁에서 패배해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한국 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행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
안의사의 정정당당한 법정 진술이다. 안의사는 이토의 죄목을 명성황후 시해부터 메이지(明治) 일왕 부친 살해까지 낱낱이 15개조(伊藤博文 罪惡十五個條)로 밝혔다.
그런 이유로 1909년 10월26일 새벽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사살한 것이다. 이것은 대한 의병의 상징이며 한민족의 기개를 세계 만방에 떨친 쾌거였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나타난 원용팔·홍주·최익현·신돌석 의병 활동 중 최대의 성과였다.
또 3·1 기미 독립 선언의 전초였다. 그의 사상에는 한국 독립뿐만 아니라 일본의 팽창주의 확산을 막고 함께 근대 국가가 되자는 국제 평화주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범인(凡人)이 할 수 없는 위인의 행동이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미국과 태프트-가쓰라 밀약에 이어 영·일동맹을 맺는 등 조선의 식민지화를 서둘렀다. 당시 추밀원 의장이던 이토는 한국에 파견돼 앞장섰다. 그는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보호조약을 강조하고 대신들을 매수했다. 일본 군대로 궁궐을 포위한 채 고종황제를 협박하고 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 등과 을사늑약을 맺은 주역이었다.
안의사는 1879년 9월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 친구와 의(義)를 맺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말 타기·사냥을 좋아하는 무인의 기질을 지녔으나 ‘사서삼경’ ‘자치통감’, 조선사·만국 역사는 물론 빌렘 신부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울 정도로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문무 겸비의 출중한 인물이었다.
안의사는 부친 안태훈 진사를 따라 의병 활동을 했고 삼흥학교 설립 등 신교육 구국 운동과 국채 보상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을사늑약 이후 조선 통감이 된 이토가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군대를 강제 해산하는 등 조선 침략을 강행하자 안의사는 1909년 우덕순·조도선 등과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 국권 회복과 동양 평화 수호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했다.
마침 그해 10월26일 이토가 만주에 오자 그는 대한국의용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 역에서 세계적인 의거를 단행한 것이다. 실로 민족혼의 뿌리를 다져 놓은 한민족사의 위업이다. 오늘도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숭고한 뜻이 대학을 거쳐 가는 모든 이의 가슴에 깊이 새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최명상 前공군대학 총장·소르본대 정치학 박사 genechoe@seoulairsho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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