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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안정훈 장군의 병영칼럼(1) 조회수 8297
작성자 4 작성일 2005.08.17
61년 후 노르망디 지난 6월13일부터 일주일간 열린 파리 에어쇼를 참관하고 귀국하는 날, 저녁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에 한나절의 여유 가 생겼다. 파리 시내 관광을 권유받았으나 우리 일행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 61년이 되는 뜻깊은 기간에 전적지를 방문하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차를 대절, 물어물어 찾아갔다. 기사 겸 가이드를 맡은 한국인 유학생은 노르망디 전적지 방문 안내는 처음이라면서 인터넷에서 검색한 자료를 잔뜩 준비해 왔으나 여러 번 길을 잘못들어 고생했다. 1944년 6월6일 새벽, 연합군 공수사단이 독일군 배후에 강하해 주요 거점을 공격한 데 이어 함포의 일제 사격이 불을 뿜었다. 오전 6시20분을 기해 노르망디 해안의 5개 지점을 향해 본격적인 상륙이 시작됐다. 항공기 1만3000대와 함선 6000여 척이 해안으로 쇄도했고 7개 사단 15만6000명이 상륙 돌격을 감행했다. 76일간 이어진 노르망디 전투에서 연합군은 21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이 중 3만7000명은 전사했다.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 상황은 TV 영화 ‘밴드 오브 브러더스’에서 아주 실감 있게 재현해 보여 줬다. 영화 ‘사상 최대의 작전’과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그중에서도 미군이 가장 격전을 치른 오마하 해변을 무대로 제작돼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 교육과 애국심 교육을 상업 영화가 대신 맡아서 해 준 것이다. 그러나 2년 전 영국에서 실시된 설문 조사에서 10대의 72%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몰랐고, 안다고 대답한 학생들조차 전쟁을 이끈 사람이 라이언 일병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르망디에 가 봤더니 기후와 경치가 좋아 휴양지로서 각광받고 있었지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결정한 격전지를 보려고 온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흔적이라고는 작은 기념관과 조형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망디가 나의 관심과 흥미를 끈 이유가 있다. 지난해 기념 행사 때 연합군과 싸워 패배한 독일의 총리가 처음으로 기념 행사에 초대받아 참석한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노르망디 행사 참석은 독일 정부의 숙원이었다고 한다. 과거 연합국들의 행사에 참석을 용인받아야만 비로소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죄과를 청산할 수 있다고 믿어 왔기 때문이란다. 슈뢰더 독일 총리의 60주년 기념 행사 참석은 틈만 나면 사과와 물질적 배상을 거듭해 온 전후 독일의 반성과 노력의 성과라는 게 일반적 평가다. 틈만 나면 잘못한 게 없고 사과할 게 없고 청산은 이미 끝났다고 부득부득 우겨 대는 일본과는 판이하기 때문에 주목됐다. 모래와 조약돌, 가파른 절벽과 구릉지, 굴·조개 등 풍성한 해산물, 아름다운 항구, 사과나무와 푸른 들판이 펼쳐진 노르망디는 61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전쟁의 흔적이 지워져 가고 있었다. 노르망디를 떠나면서 우리도 하루빨리 평화 통일을 이뤄 전쟁의 상흔이 깨끗이 아물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안정훈 공본 정훈공보실장·준장 vikidad@freechal.com> 커뮤니케이션이 해답 GP 총기 난사 사고 이후 병영생활 개선을 위한 각종 대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열악한 내무실 시설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근무 형태를 바꾸고, 장병 인권 보장 방안을 마련하고, 군대에서도 대학 학점을 딸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겠다 등등. 하지만 당장 시급한 것은 따로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병사들이 휴가 나가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두 가지 있다. 집에 가면 우선 어머니 핸드폰을 빌려 친구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날린다. 또 하나는 PC방으로 달려가 밤새워 가며 그동안 못한 게임에 실컷 빠지는 것이다. 신세대는 이렇게 모두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 있다. 병사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있다. 어쩌다 내무실이나 식당을 둘러본 사람들이 “요즈음 군대 정말 좋아졌다. 내무실도 깔끔하고 식당 밥도 먹을 만하고 TV도 마음대로 보고…. 내가 군대생활할 때와 비교하면 거의 호텔급”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미운 마음과 함께 어쩔 수 없는 단절의 벽을 느낀다. 눈높이가 자기에게 맞춰진 사람들이다. 이제는 문제 인식부터 대책까지 철저히 병사들의 입장이 돼 고민해 봐야 한다. 군대는 보안이나 예산 혹은 운영 관리 등의 문제 때문에 신세대 장병의 요구를 제대로 충족해 주지 못한다. 병사들은 체념하고 시간 때우기로 마음을 달랜다. 싸이월드·블로그·메신저 등을 통해 마음껏 할 말을 하고 살아 온 젊은이들이 꿀 먹은 벙어리로 살아야 하는 현실이 힘겨울 수밖에 없다. 정신교육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역처럼 느껴진다. 일방적 주입식이다. 게다가 주5일 근무제는 시간 때우기를 더 어렵게 하고 있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것이 ‘끼’와 ‘취미’를 살릴 수 있는 동아리 활동이고,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감사의 마음을 느끼게하는 자원 봉사 활동이다. 그래도 부족함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의 어원은 ‘나누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communicare다. 커뮤니케이션은 ‘쌍방이 서로 주고받는 관계’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일부 훈련소에서는 입소에서부터 수료할 때까지 전 과정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홈페이지에 올려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고립의 섬에 인터넷 연륙교를 놓아 세상과 서로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것이다. 미흡하지만 신뢰의 커뮤니케이션이 효과를 발휘하는 좋은 사례다. 병영은 오지다. GP는 무인도다. 이들에게는 고립감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 이들에게 절실히 필요한건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다. 상하 수평 간에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진다면 엉뚱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터넷이나 핸드폰을 마음대로 쓰게 할 수는 없으니 우선 온라인으로 내부를 연결해 주는 인트라넷 인프라를 확장, 활용해야 한다. 그러면서 점차 인터넷 활용을 늘려 나가야 한다. 면대면 소통에 부담을 느끼는 신세대 장병들에게는 아주 좋은 대화 통로가 될 것이다. 〈안정훈 공군본부 정훈공보실장·준장 vikidad@freechal.com〉 ‘진주만의 일장기’ 7월16일부터 20일까지 하와이에 있는 미 태평양사령부를 비롯한 공군·해군사령부, 그리고 정보센터와 전쟁포로·실종자 신원확인소 등을 방문했다. 위성사진 수신 장비 이글아이(eagle eye)와 핵잠수함 샬럿호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브리핑·토론·견학·간담회 등으로 빡빡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환대를 받았고 변화하고 있는 미국의 동북아 군사 전략과 전력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어 보람이 있었다. 올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6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그 각별한 의미를 되새기며 역사의 현장인 진주만을 찾았다. 거기서 뜻하지 않은 장면을 보고 새로운 감회를 느꼈다. 일본 해상자위대 이지스함 2척이 일장기를 휘날리며 해군 기지에 정박해 있었던 것이다. 안내하는 미군 장교에게 물었더니 해상자위대 함정이 일년에도 몇 차례씩 진주만에 기항하기 때문에 전혀 낯설지 않다는 설명을 해 줬다. 우리나라 해군은 2년에 한 번 정도 순양 중에 하와이에 들른다고 한다. 피를 흘리며 싸웠고 너무나 많은 희생과 아픔을 준 일본의 군함이 일장기를 휘날리며 정박해 있는 모습에서 세월의 변화를 느꼈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경구가 새삼 떠올랐다. 새로운 감회를 느끼며 진주만에 있는 애리조나 기념관과 전함 미주리호를 방문했다. 64년 전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자기의 땅에서 치욕적인 공격을 당했던 역사가 그대로 보존돼 있는 곳이다. 1941년 12월8일 360대의 일본 전투기는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정박해 있던 애리조나호를 비롯한 5척의 구축함과 14척의 소형 전함을 침몰시키고 200여 대의 군용기를 파괴했다. 2000명이 넘는 미 해군이 전사했고 4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진주만을 상기하자!”라는 구호 아래 전 미국이 일치단결했다. 현대적인 전쟁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선전전과 여론전에서 승리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1962년 진주만 공습 때 침몰된 애리조나호 위에 기념관이 세워졌다. 애리조나호는 어뢰를 맞고 침몰하면서 1177명의 해군이 전사한 비운의 전함이다. 기념관 아래 바다 밑에는 격침된 애리조나호의 잔형이 보이고 아직도 기름이 새어 나온다. 선체는 일부러 인양하지 않았다. 배의 잔해 안에는 당시 전사한 군인들의 시신이 해골이 된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용서는 하지만 결코 잊지는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다. 전함 미주리호는 애리조나 기념관과 마주 보는 위치에 정박해 있다. 미주리호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을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조인식이 거행된 유서 깊은 전함이다. 1992년에 퇴역, 7년 후부터 기념관으로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다. 애리조나호가 비운의 전함이라면 미주리호는 영웅의 전함이다. 뼈저린 아픔을 딛고 승리의 역사를 이룩한 미국인의 자긍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대칭되게 배치해 놓은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진주만 기습이 있은 지 정확히 60년 후 미국은 본토의 심장부에서 알 카에다의 테러 공격을 받고 경악했다. 지금 미국은 이라크에서 힘든 전쟁을 하고 있다. 가정이기는 하지만 50년 후 혹은 60년 후 미국과 중동 국가들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궁금해진다. 역사도 진화돼야 한다. 살육이 아니라 평화가, 증오가 아니라 애정이, 대립이 아니라 협력이, 야만이 아니라 이성이 지배하는 역사가 만들어지기를 기원한다. <안정훈 준장ㆍ공군본부 정훈공보관실장 vikidad@freechal.com> ‘자유의 투사’ 퇴장 소감 내가 1976년 소위로 임관해 첫 배속돼 간 곳은 해발 1192m의 팔공산이었다. 훈련이 끝나고 임관하기 직전에 방공무기통제사라는 특기를 받았다. 그날 밤 같은 구대원들이 특식으로 나온 빵을 모아 산신령님께 바친다며 나에게 준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해 겨울 내내 눈 덮인 산꼭대기에서 훈련관제사 교육을 받았다. 나는 그 겨울 작전실에서 처음으로 F - 5A/B(자유의 투사)를 만났다. ‘자유의 투사’는 어두컴컴한 작전실의 스코프 위에 12초마다 한 번씩 깜박이는 노란 점으로 나타났다. 훈련관제사는 100회의 요격 관제 임무를 수행해야 비로소 퀄리파이(Qualify)가 돼 단독으로 관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 당시에는 F - 5A/B가 우리 공군의 주력 기종이었다. 그래서 험난한 100라운드 경기의 내 파트너는 대부분이 ‘자유의 투사’였다. ‘자유의 투사’는 자체 레이더가 없었다. 관제사가 레이더로 탐지한 가상 적기 근처까지 유도, 낮은 고도에서 꼬리를 물어 공격할 수 있는 위치까지 관제해 줘야만 했다. 보통 5마일, 기상이 좋지 않을 때는 3마일까지 붙여 줘야만 겨우 육안으로 적기를 보고 공격하곤 했다. 어쩌다 미션이 실패해서 콘택트 로스트가 되면 다시 유도해서 공격 패턴으로 진입시킬 때까지 식은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그러고 나면 교관 관제사의 고함과 질책에 모골이 송연해지곤 했다. 그렇게 100회의 미션을 채우며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다. 그래도 ‘자유의 투사’는 공군의 주력 기종으로 오랫동안 조국의 영공을 지켰다. 1965년에 도입돼 40년간 운용되던 F - 5A/B가 지난 3일 정식으로 퇴역했다. 이번에 퇴역한 ‘자유의 투사’는 교육용·전시용·실습용으로도 활용되지만 반 이상은 멕시코·폴란드 등에 판매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대당 판매 가격은 100달러 정도가 될 것이라고 한다. 명목상으로는 판매지만 사실상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자체적으로 개발한 훈련기를 수출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한다. 과거에도 필리핀에 대당 100달러를 받고 퇴역한 F - 5A/B를 판매한 적이 있다. 옛날에는 조종사가 되려면 첫째 눈이 좋아야 했다. 지금은 시력이 0.5만 돼도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진다. 각종 첨단 전자 장비가 항공기에 장착됐기 때문이다. 이제는 수십 마일 전방에서 미사일을 발사, 목표물을 정확히 파괴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자유의 투사’가 퇴역하는 것을 보면서 남다른 감회를 느끼며 최신예 항공기의 빠른 도입을 간절히 기대한다. 〈안정훈 준장·공군본부 정훈공보실장 vikidad@freechal.com〉 ‘캡스톤 그룹’ 올해 공군 장군 진급자들은 지난 7월13일부터 9일간 일정으로 일본 자위대와 하와이에 있는 미군의 주요 기지들을 방문했다. 오랫동안 필요성이 제기돼 오다가 이번에 최초로 예산이 반영돼 실시된 뜻깊은 시찰이었다. 이번 시찰을 통해 한반도 주변 안보 상황을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고 대상 국가의 작전 계획 시행 준비와 태세를 직접 확인 할 수 있었다. 또 한·미 간, 그리고 한·일 간의 선린과 우호를 증진하고 군사 우호 관계와 신뢰를 크게 증진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방문 기간 중 가는 곳마다 영문으로 된 안내문이나 브리핑 자료가 제공됐다. 자료에는 항상 맨 앞장에 ‘환영, 한국의 캡스톤(Capstone) 그룹’ 이라고 표기돼 있었다.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졌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귀국 후에 신문을 보니 “미 캡스톤 그룹이 지난달 31일 방한해 미국 대사관과 한미연합군사령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한국 합동참모본부, 육군3사단과 오산 공군 기지 등을 방문하고 3일 출국했다”는 기사가 나와 다시 관심을 갖게 됐다. 캡스톤이란 ‘건물 현관문의 맨 윗부분에 있는 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미군은 장군 진급 예고 후 2년 이내에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최고 교육 과정에 캡스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82년 미 국방대학원에서 장군 진급자 대상 프로그램으로 처음 시작됐다. 86년 이후에는 장군 진급자가 반드시 이수토록 의무화했다. 6주간의 과정 중 2주 동안은 태평양·유럽·서반구팀으로 나눠 순방하며 연간 4회 실시된다. 캡스톤 그룹은 교육 기간 중 국가 안보 의사 결정과 군사 전략, 연합 합동 교리와 상호 운용성, 주요 동맹국 관련 사항 등을 주제로 강의·토론·견학 등을 실시한다. 외국 현장 교육시에는 자국의 통합사령관과 주재 대사, 방문국 군 주요 인사들과 면담을 갖고 군사 외교 활동도 수행한다. 이들의 한국 방문은 85년 이후 60여 회에 걸쳐 960여 명에 달한다. 지난해에도 3회 방문했고 올해에는 2회 실시된다. 지난번 한국 방문팀의 인솔 단장은 토머스 R 모건 예비역 해병대장이다. 그는 이번이 열한 번째 방한이다. 54년 소위로 임관해 88년 대장으로 전역했다. 현재는 미 국방대학원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통이다. 79년에는 한미연합사 기획관리참모부장으로 근무했다. 한국 전문가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전문가가 인솔하는 팀은 짧은 시간이지만 넓고 깊게 보고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전문가를 어떻게 양성하고 관리·활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다. 리더십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라 교육과 경험과 노력을 통해 배양되는 것임을 실감케 한다. 한국은 진급 장성의 해외 순방을 이제 처음 시작했지만 ‘코리아 캡스톤 그룹 프로그램’이 정례화되면 강한 군대를 만드는 데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안정훈 준장·공군본부 정훈공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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