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광장 > 안보논단
 
제 목 최명상 장군의 병영칼럼(1) 조회수 8966
작성자 4 작성일 2005.08.16
팍스 아메리카나와 한·미동맹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을 봉쇄 정책으로 붕괴시켜 마침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됐다. 미국의 경제력이나 국방 예산은 전 세계 국가의 총화를 능가한다. 미국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새로운 국제 질서를 형성해 가고 있다. 이러한 팍스 아메리카나의 국제 질서 형성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1991년의 걸프 전쟁, 99년의 코소보 전쟁이다. 더욱이 9·11 테러 이후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팍스 아메리카나의 국제 질서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하버드 대학의 조지프 나이 교수는 향후 100년을 예상하고 있다. 필자 역시 팍스 아메리카나의 국제 질서가 21세기에도 계속될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팍스 아메리카나의 국제 질서 속에서 한반도의 안보와 한민족의 통일·번영은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 즉, 한·미동맹 관계가 근본 축이 돼야 한다. 한·미동맹 관계를 저버리고는 국제 사회에서 살아남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최근 한·미 관계의 틈새를 이용해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나왔을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념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택했고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은 것은 역사적인 선택이며 축복이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택한 소련이 멸망했고 그 동맹국이었던 공산 국가 정권들이 모조리 멸망해 가는 20세기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이러한 공산주의 몰락을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로 표현하고 있다. 북한도 마찬가지로 소련 붕괴와 더불어 공산 체제 몰락의 위기를 당했으나 핵 개발로 체제를 유지하려 하고 있다. 토머스 허바드 전 주한 미국 대사는 이임사에서 “최근 들어 많은 한국민은 북한에 대해 위협을 덜 느끼는 반면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민은 그 위협을 더 느끼고 있는 것이 한·미 양국의 다른 점”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국가 안보 전략을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방지와 국제 테러리즘의 발본색원, 그리고 그를 위한 선제 공격 불사로 바꿨는데 북한은 여전히 핵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대단히 예외적인 나라다. 미국은 지정학적 무풍지대에 있는 나라였다. 동쪽의 대서양과 서쪽의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방파제를 가졌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미국인들은 세계 도처에서 테러의 위험 속에 항공기 탑승도, 고층 건물을 마음 놓고 올라갈 수도, 우편물을 마음대로 뜯어볼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러한 미국의 전략 변화와 미국인의 처지를 십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 미국 정부와 미국민들도 성숙된 한국 사회 일각의 좌파 성향과 반미 정서를 이해하고 포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하루속히 대한민국을 일본과 같은 무비자 국가로 격상시켜 한국민의 자존심을 존중하고 신뢰를 높여야 한다. 상호 간에 사소한 것부터 한·미 유대 강화를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우리 모두는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절실히 인식하면서 21세기 한민족의 미래를 설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제적 현실에 살고 있는 것이다. 〈최명상 예비역 공군준장·前 공군대학 총장 genechoe@seoulairshow.com〉 나의 部隊訓 나는 20여 년 전 새로운 부대 창설의 임무를 맡은 적이 있다. 최신예 전투기 F-16의 부대 창설이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여러 가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대의 가르침(部隊訓)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고심했던 기억이 난다. 새로 모이는 부대원들에게 왜 이 부대에 왔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사명감을 고취할 수 있는 간결하고 함축적인, 그리고 가슴 뭉클할 문구였다. 여러 날 생각하다가 찾아낸 부대훈(모토)이 바로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였다. 로마의 장군 플라비우스 베지티우스의 명언이다. 이 부대훈은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나에게는 지금도 가슴에 와 닿는 훌륭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난번 초청 특강시 이제 대한민국의 막강 전력으로 성장, 영공 방위 임무를 탁월히 수행하고 있는 장병들과 부대 모습에서도 이를 실제로 확인하고 기뻤다. 그리스의 선진 문화·문명의 영향을 받은 로마 제국은 공화국으로 출발, B.C. 272년께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차지했다. B.C. 1세기께 강대국이던 한니발의 카르타고를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 끝에 마침내 스키피오 장군이 정복했다. 이어 시저로도 불리는 유명한 카이사르 장군이 현재의 프랑스·스페인 등 갈리아 지방을 정복하고 영국의 남부까지 점령했다. 드디어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지중해 연안 전역과 유럽 전체는 물론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1000년을 지배했다. 당시 전쟁은 강자의 논리대로 부국강병을 위한 정복의 수단이었고 목적이었다. 또 정복에 의한 혜택으로 로마인들은 B.C. 167년께부터 국가에 세금도 내지 않았다. 원로원의 분할 통치 정책으로 자치 도시가 운영되기도 했으나 과도한 성장과 거대한 국토 확장으로 공화정이 세계 지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 대로마 제국을 건설했다. 이러한 제국의 건설 과정에서 베지티우스도 혁혁한 공을 세운 전사이고 장군이었으며, 그의 경구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는 당시 로마 군인들에게 확고한 전쟁관과 애국심을 고취한 사상이었다고 믿어진다. 그리스에 이은 로마는 유럽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의 근본 틀을 마련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는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고 그야말로 로마에 의한 세계 지배,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이룩하고 그리스·로마 문명을 전 세계에 전파했다. 로마의 상징이었던 도시의 넓은 광장, 신전, 원형 극장, 공동 목욕탕, 개선문, 고가식 수로, 황제 숭배사상 등은 지금도 로마의 속주(屬州)였던 유럽 각지에서 볼 수 있다. 나는 로마 여행 중에 우연히 유치원생들이 원형 극장 앞에 세워 놓은 로마 제국의 단계별 유럽 점령도를 열심히 보는 것을 목격하고 하루빨리 우리 어린이들에게도 저 만주 벌판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견학시키고 고구려가 지배했던 중국의 단계별·연대별 점령도를 보여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역사는 고난과 불행했던 시절도 많았지만 한때는 만주 벌판을 지배했던 한민족의 자랑스러움과 자긍심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믿어진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라는 베지티우스의 경구를 되새기면서 대한민국 전 장병의 무운 장구를 기원한다. <최명상 前 공군대학 총장·소르본대 정치학박사 genechoe@seoulairshow.com> 나폴레옹의 독서열 프랑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바로 앞에 고색창연한 군사학교가 나타난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나폴레옹이 공부하던 군사학교 건물이다. 오늘날 수많은 시민이 애용하는 에펠탑 공원도 나폴레옹이 군사 훈련을 받던 연병장이었다. 그곳은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세계박람회를 위해 파리 시에 기증됐고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이 그곳에 높이 310m의 거대한 철탑을 세운 것이다. 그 군사학교에는 아직도 나폴레옹 생도가 사용하던 책상·의자가 보존돼 있고 더욱이 그가 보던 책들도 도서관에 그대로 비치돼 있다. 그는 한 시대의 영웅이며 위대한 군인이었다. 불후의 명작 ‘전쟁론’을 집필한 프러시아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적장(敵將)인 그를 가리켜 ‘전쟁의 신’으로 칭송하고 있다. 나폴레옹이 12개의 대회전에서 승리하고 유럽 전체를 지배할 수 있었던 능력과 비결은 어디에서 형성된 것일까. 필자는 이러한 의문을 풀어보려고 그가 공부하던 교실과 도서관에 들러 그의 손때 묻은 전쟁 서적들을 들추곤 했던 기억이 난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승리 비결은 바로 엄청난 독서 덕분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나폴레옹은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모든 전쟁 서적을 탐독했다. 알렉산더 대왕을 읽었고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의 전략을 읽었으며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와 신구 교도의 30년 전쟁, 그리고 루이 14세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사를 섭렵했으며 특히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그는 일생 동안 약 8000권의 서적을 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단한 독서광이다. 전쟁 중에도 하루나 이틀에 한 권씩 읽은 셈이니 엄청난 독서열이 아닐 수 없다. 나폴레옹은 늘 부하들에게 전쟁에 관한 역사서를 읽으라고 권장했다. 그가 책 속에서 얻은 전쟁의 교훈들이 그의 용병술로 활용됐음을 엿볼 수 있는 일면이다. 지중해의 작은 섬 코르시카에서 1769년 태어난 나폴레옹은 루이 15세가 설립한 왕립군사학교에 선발돼 입학했다. 내성적인 시골 소년 나폴레옹 생도는 주말에도 도서관에서 살았다고 한다. 51명 중 42등으로 졸업했으니 우수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훗날 세상을 바꾼 야망의 포병 장교가 된 것이다. 1795년 부르봉 왕조 부활을 시도하는 왕당파군을 격파함으로써 일약 프랑스 혁명군의 지도자가 됐다. 1796년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또 1798년 이집트 원정에 성공함으로써 1802년 종신 총통에 선출됐다. 그는 드디어 1804년 노트르담 사원에서 프랑스 황제로 즉위한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하던 나폴레옹도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하고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에게 패배, 결국 몰락하고 만다. 그렇지만 아직도 프랑스인들은 그가 세운 개선문 광장에서 오늘도 승전 행사를 자랑스럽게 치르고 있다. 또 그의 유해가 묻혀 있는 엥발리드 군사박물관 대성당에는 해마다 수백만 명의 인파가 몰리고 있다. 세계 여론 조사 기관 NOP 월드는 한국인의 독서 시간이 1주일에 3.1시간으로 30개국 중 최하위라고 발표한 바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친애하는 장병들에게 유배지에서도 영어 공부를 한 나폴레옹처럼 많은 독서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위대한 미래를 설계하라고 권하고 싶다. <최명상 前 공군대학 총장ㆍ소르본대 국제정치학 박사 genechoe@seoulairshow.com> 국제질서와 한국전쟁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체제는 곧바로 미국과 소련 대결의 냉전 체제로 양극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냉전 체제의 국제 질서가 한국전쟁을 야기했다. 당시 어떠한 국제적 사건과 상황들이 한국전쟁을 발발시켰는지 그 원인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첫째, 소련 스탈린의 세계 소비에트화 전략 때문이다. 스탈린은 동구권 국가들을 공산위성국화하고 소비에트화 전략으로 서방 세계를 공산화하려 했다. 둘째, 미국의 일본 단독 점령에 대한 소련의 불만 때문이다. 스탈린은 유럽에서 승리, 독일을 분할 점령했듯이 태평양 전쟁의 참전 대가로 일본을 분할 점령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이 원자폭탄으로 일본을 단독 점령하자 한반도 38선 이북 점령에 그쳐 불만이었다. 셋째, 소련의 그리스·터키 공산화 시도와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의 대결이다. 넷째, 유럽의 경제 부흥으로 공산화를 막으려는 미국의 마셜 계획과 이에 대응한 소련의 코민포름(Cominform), 코메콘(COMECON)의 대결이다. 조지 마셜은 1947년 하버드 대학의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에서 유럽 경제 부흥 대규모 원조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유고슬라비아 등 공산 국가들도 미국의 원조를 원했으나 소련은 이에 반대, 1943년 해체한 국제 공산주의 코민테른(Comintern)을 공산당 정보국인 코민포름으로 부활시켜 공산 국가들을 단합했다. 그때 소련의 제2인자였던 블라드미르 즈다노프는 “이제 세계는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완전히 분열됐다”고 선언한 바 있다. 또 그들만의 경제 협력 기구인 코메콘 창설로 대결했다. 다섯째, 티토의 노선 이탈(티토이즘)과 베를린 봉쇄, 그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이다. 독자적 노선으로 이탈하려는 유고슬라비아 티토의 저항에 대해 스탈린은 공산 종주국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크게 분노했다. 다른 공산 국가들의 동요와 저항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독일 통화로 경제적 통합하려는 서독을 위협하고자 서베를린 통로를 모두 봉쇄했다. 이에 서방 국가들은 군사적 기구인 나토 창설로 대결했다. 여섯째,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 대륙 석권이다.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은 통일 전선 전략으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군을 패배시키고 1949년 10월 중국 대륙을 석권,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스탈린은 예상 외로 마오쩌둥이 승리하자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종주권에 대한 위협을 느꼈다. 스탈린은 일본 분할 점령 좌절과 티토의 노선 이탈 등으로 자신의 세계 소비에트화 전략에 손상을 입었다. 이때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 지원함으로써 공산주의 종주권을 확고히 하고자 사주한 것이 한국전쟁이다. 냉전 국제 질서의 산물인 것이다. 한국전쟁은 스탈린·김일성·마오쩌둥의 공동 음모에 의한 남침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소련이 몰락한 현실에 아직도 김일성의 적화 통일을 찬양하는 사이비 학자의 수정주의사관(修正主義史觀)에 현혹돼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 도움을 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를 외치는 무리들은 각성해야 한다. 새로운 국제 질서에서 북핵 문제가 평화롭게 해결되도록 온 국민이 총력을 기울일 때다. <최명상 前공군대학 총장·소르본대 국제정치학 박사 genechoe@seoulairshow.com> 金九와 드골 광복 60주년을 맞아 생각나는 두 인물이 있다. 김구(金九) 선생과 프랑스의 드골이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 구국의 지도자였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기쁜 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다. 천신만고로 애써 참전 준비한 것이 다 허사다. 가장 걱정되는 일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 국제 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1945년 8월15일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광복되던 날 백범 김구 선생의 탄식이다. 중국 충칭(重慶)에 머무르던 임정 요인들이 “주석 각하, 우리가 고대하던 일본이 항복했는데 어찌 기뻐하시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김구는 기쁨보다 조국 장래에 대한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그는 전후 한민족의 운명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갖고 있었다. 그의 우려대로 한반도는 광복 후 38선으로 분단됐고 60년이 지난 지금도 통일의 길은 막막하다. 21세 청년 김구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 군인을 살해하고 사형수가 됐다. 탈옥해 마곡사 승려가 되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 105인 사건 등으로 투옥과 출옥을 거듭하다가 기미 독립선언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부장·내무총장·주석으로 봉사했다. 항일 독립 투쟁을 계속하며 윤봉길·이봉창 의사 등을 지도했다.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일본 선전 포고문을 발표했다. 김구는 전후 한국 입장 강화를 위해 장제스(蔣介石)의 협조로 광복군 특공대가 미군과 함께 한반도 상륙작전에 참가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미국의 원폭(原爆)으로 일본이 조기 항복하는 바람에 우리 광복군은 참전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김구의 탄식만큼 실로 애통한 역사의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프랑스의 드골은 그의 뜻대로 위대한 프랑스를 재건했다. 드골은 상관으로 모셨던 페탱 원수가 나치 독일의 히틀러에게 1940년 6월 항복하자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즉각 영국으로 망명, BBC 방송을 통해 “모든 프랑스인이여 ! 프랑스는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지지 않았다. 위대한 조국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레지스탕스의 불길을 일으키자. 비바 라 프랑스!”라고 외치면서 프랑스의 해방 투쟁과 독일 점령에 대한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위대한 정신과 투쟁은 그를 1943년 자유 프랑스 망명정부 수반으로 선출되게 했다. 그는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최선봉으로 파리에 입성,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전승국임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드골의 역할로 전후 국제 질서 재편 과정에서 프랑스가 전승국의 일원으로 패전국 독일을 미국·영국·소련과 함께 분할 통치하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된 것이다. 또 그는 프랑스인들이 좋아하는 500여 종류의 치즈와 포도주만큼이나 분열된 국론을 강력한 리더십으로 통합해 프랑스를 G-7(서방 선진 7개국)의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김구와 드골은 불타는 조국애와 의로운 신념으로 빼앗긴 조국을 구했으며 미래를 예견하는 통찰력과 철학을 지닌 위대한 인물이었다. 토그빌은 민주주의가 위대한 인물을 키우지 못한다고 했지만 국민들은 여전히 탁월한 식견과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를 원한다. <최명상 前공군대학 총장·소르본대 국제정치학 박사〉
 
이전 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임시대표에게 보내는 공개질의
다음 안정훈 장군의 병영칼럼(1)
 
전체댓글수총0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