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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나폴레옹과 드골 조회수 10745
작성자 4 작성일 2008.10.24
프랑스 파리에는 역사적 유물이 많다. 루브르 박물관, 노트르담 성당, 개선문 그리고 에펠탑을 4대 명승지로 꼽는다. 그중에 개선문이 위치한 곳을 샤를 드골 광장(Place de Charles de Gaulle)이라고 부른다. 개선문은 1806년 나폴레옹 황제 때 공사를 시작해 1836년 완성됐다. 샹젤리제 거리를 중심으로 울름·예나·오스텔리츠 등 전승지의 이름을 따서 12갈래 길로 나뉘어 있다. 나폴레옹은 생전에 개선문을 보지 못했다. 1840년 그의 유해가, 세인트 헬레나에서 죽은 지 19년 만에 개선문을 통과할 때 10만의 군중이 모였다. 엘바 섬에서 탈출해 파리에 돌아올 때 100만 군중이 따랐던 것에 비하면 적은 수지만 국민들의 지지가 대단했음을 짐작하게 한다.그런데 왜 그곳을 오늘날 드골 광장이라 부르는 것일까.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서 프랑스를 근대화했다. 프랑스 혁명정신인 자유(Liberte)·평등(Egalite)·박애(Fratenite) 사상을 전 세계에 전파했다. 파리의 모습도 웅장한 도시로 바꿔 놓았다.콩코드 광장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는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고, 방돔 광장에 세워진 청동제 큰 기둥은 전쟁에서 노획한 대포를 녹여 만든 것이다. 루브르가 세계적인 박물관으로서 위상을 갖게 된 것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와 이집트 원정 덕분이다. 아울러 현대의 드골도 나폴레옹 버금가는 큰 업적을 남겼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으로 미국·영국·소련과 더불어 독일 분할점령에 참여했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됐으며 G7 선진국을 만들었다.아이젠하워 연합군총사령관이 지휘하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는 참전하지 못했지만 레클레르(Leclear) 장군과 함께 선두에서 파리를 해방시켰다. 드골은 조국의 구원자로서 국민의 환영 속에 임시정부의 수반이 됐다. “우리 프랑스 국민은 500여 가지 포도주만큼이나 개성이 강한 민족이기 때문에 강력한 대통령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지만 정치인들이 내각책임제를 고집하자 정계에서 은퇴했다.그러나 54년 식민지 베트남 디엔비엔푸의 패배, 56년 이집트 나세르의 프랑스가 경영하던 수에즈 운하 국유화, 58년 식민지 알제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국민들은 다시 드골을 원했다. 강력한 7년 임기의 대통령제 개헌으로 제5공화국이 수립되고 5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제를 재건하고 항공산업, 핵산업, 고속전철(TGV) 산업을 세계적 기업으로 육성했다.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하고 공업대국으로 만들었다. 미소 냉전체제 속에서도 독자적인 외교정책으로 국위를 선양하고 유럽통합의 주역이 됐다. 하지만 68년의 철부지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하자 국민 투표를 실시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회고록 집필에 골몰하다 70년 서거했다. 나폴레옹과 드골은 혼란과 격동의 시대에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 조국을 구한 것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강국 프랑스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나폴레옹 개선문을 샤를 드골 광장으로 부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최명상 전 공군대 총장·국제정치학박사 genechoems@hanmail.net> 2008.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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