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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징비록과 남한산성 조회수 9034
작성자 4 작성일 2008.01.14
징비록<懲毖錄〉과 ‘남한산성’ 시경(詩經)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인용해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서애 유성룡 선생은 전쟁이 끝난 후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그 결과를 회고해 반성하며, 후세에 알려 다시는 이러한 참혹한 일이 없도록 한다는 뜻에서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했다. 임진왜란은 선조 25년, 1592년(임진년) 4월 13일에 일본의 풍신수길이 1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부산포에 침입, 1598년 11월까지 무려 7년간에 걸쳐 왜군에 의해 국토가 초토화되고 조정이 유린된 민족수난의 역사다. ‘징비록’에는 조선의 장수들이 왜군의 조총 앞에 제대로 저항해 보지도 못하고 파죽지세로 패퇴해 한 달여 만에 한양이 함락되고, 경기도 양주에서 비로소 적군 60명을 사살했다는 장계가 최초로 조정에 보고되는 등 부끄러운 기록들이 즐비하다. 후에 명나라의 이여송이 이끄는 지원군이 투입되어 전세를 전환시킨 뒤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영웅의 활약으로 해전에서 연전연승하는 전과를 거뒀지만, 유성룡은 ‘1598년 8월에 일본의 풍신수길이 갑자기 죽게 되어 왜군이 물러나는 천운(天運)’이 작용하여 전쟁이 끝났다고 기록했다. 즉, 임진왜란이 아군의 승리에 의한 종전이 아니라 적장의 죽음으로 인한 적의 자진퇴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유성룡은 전란의 원인과 결과, 조정의 온갖 실책에 대한 대비책 등을 정리해 ‘징비록’에 그 교훈을 수록했다. 하지만 조선은 이러한 비참한 환란을 겪고 나서 불과 40년이 지나지 않은 인조 14년, 1636년(병자년) 12월 14일에 또 다시 국난을 맞아 돌이킬 수 없는 민족 최대의 수모를 겪게 된다. 최근에 베스트셀러가 된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 의하면,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청(淸)나라 군대를 피해 조정 대신과 함께 남한산성에 피신했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위세를 이기지 못하고 처참한 형국으로 전쟁 발발 46일 만인 이듬해 1937년 1월 30일에 삼전도에서 청나라의 황제(칸)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통한의 역사를 남겼다. 당시 조정은 사대주의에 물든 대신들이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주변국의 동향을 잘못 판단했다. 이미 청나라가 중국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분을 내세워 명(明)나라에 변함없이 군신의 예를 지키는 치명적인 외교적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징비록’이 주는 교훈은 국가의 리더가 국제정세 판단을 잘못해 국난을 당했고, 더구나 국방태세의 부족으로 처절한 피의 교훈을 남겨 후세들에게 다시는 굴욕적인 침탈을 당하지 말라는 것이었는데도 ‘남한산성’에 의하면 또 다시 굴욕적인 수난을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였던가? 그러나 결코 반복돼서는 안 되는 역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을 똑바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새해 벽두에 다시 한번 군인으로서 역사적 사명을 돌이켜 보게 된다. <한경표 공군대령·국군지휘통신사령부> [ 2008년 01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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