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5話 문학동네에서 살고지고...:16 시를 뺏긴 시인 신동문
역사가 우는가 세계가 우는가 신이 우는가
우리도 아, 신화같이 우리도 운다. -신동문
하늘도 밭 가는 농부에게서 쟁기를 뺏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이 글을 쓰는 사람에게서 붓을 뺏는 일은 사람이 할 짓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넘어온 시대에는 붓을 쥔 손이 함부로 꺾이고 비틀리고 끝내는 글 쓰기를 못하게 하는 잔혹한 행패가 거리낌없이 저질러지고 있었다.
조국광복에서 다시 6·25, 그리고 4·19 혁명이 진행되는 사이 이 땅의 시도 언제까지 봄 꽃들처럼 방긋거리며 서정의 명주실만 뽑아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신춘문예의 부활과 함께 시대와 역사를 향해 내지르는 뜨거운 언어들이 시의 새 모습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그 대열의 선두에 시인 신동문(辛東門)이 있었다.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박봉우의 `휴전선`과 함께 시 `풍선기`가 당선되자 신동문은 그 해 시집 『풍선과 제3포복』을 내 시단에 새 물결을 일으킨다. 봇물처럼 터져나는 그의 시 정신은 4·19를 만나서 마침내 해일로 넘쳐난다.
"서울도/ 해 솟는 곳/ 동쪽에서부터/ 이어서 서,남,북/ 거리거리 길마다/ 손아귀에/ 돌 벽돌알 부릅 쥔 채/ 떼지어 나온 젊은 대열"로 시작하는 `아! 신화같이 다비데 군(群)들`은 `1960, 4·19 한낮에`라는 부제가 말하듯이 그 폭발의 지점에서, 역사의 현장에서 억누를 길 없어 터져나온 것이다.
"마지막 발악하는/ 총구의 몸부림/ 광무하는 칼날에도/ 일사불란/ 해일처럼 해일처럼/ 밀고가는 스크럼/ 승리의 기를 꽂을/ 악의 심장 급소를 향하여/ 아! 신화같이 전진하는 다비데 군들" 1백8행의 시를 다 옮겨적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거니와 이 시가 바로 4·19 직후인 60년 6월호`사상계`에 실린 이후 오늘토록 비평가와 시인들은 입을 모아 단연코 4·19 혁명시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이 절창의 시가 쓰여지고 있던 그 시각 나는 경무대 앞 바리케이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난사되는 총탄을 피해 아스팔트에 엎드려 포복하고 있었다. 총성이 멎은 후 쓰러진 젊은 이들을 나르던 친구의 피묻은 손과 악수를 나누고 나는 휘적휘적 걸어서 공초 오상순이 계신 명동 서라벌로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신동문 시인을 처음 만난 곳도 그 무렵 공초가 계신 서라벌 다방에서였다.
그는 마산의 폐결핵 요양소에서 시들어가는 젊음을 어찌할 길 없어 막무가내로 뛰어나왔다고 내게 들려주었다. 알고보니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했다가 휴학했으며 공군에 자원입대해 거기서 얻은 글감들, 공군기지를 배경으로 한 여러 정경들을 시로 썼다가 신춘문예에 당선도 되고 시집도 냈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앙가주망 시인으로 신동문은 단연코 앞서 나갔다.`아니다의 주정(酒酊)`등에서 거침없는 풍자와 해학·역설로 시의 화살을 쏘아댔다.
"아니다/ 아니다/ 아메리카도 NO/ 소비에트도 니에트" `아니다의 주정`의 한 구절이지만 그때에는 그런 낱말을 쓰는 시인이 없었다.
젊은 혁명의 새 기운이 일자 창간된 `새벽`지의 주간으로 최인훈의 `광장`을 극적으로 게재하기도 한 그는 64년 경향신문 특집부장으로 `김삿갓 따라 강산천리`를 연재하기도 했는데 쌀값이 한창 오르자 어느 독자의 "북한에는 쌀이 남는다니 수입이라도 하자"는 투고를 그대로 실은 것이 화근이 되어 중앙정보부에서 모진 고문과 함께 글을 쓰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다.
신구문화사 주간으로, 69년에는 `창작과 비평`발행인으로 누구보다도 글쓰기의 유혹이 많았던 그는 65년 이후 끝내 붓을 꺾고 침묵을 지키다 93년 가을 췌장암으로 문학동네와 작별을 했다. 그의 말년에는 충북 단양에서 포도농장을 하면서 침술을 익혀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료로 병을 고쳐주어 신바이처라는 별명을 듣기도 했다.
시집을 내자는 주위의 권고에 "쓰레기만 더 할 뿐"이라고 고개를 내저었다니 이렇게 "쓰레기만 더 하는"내가 부끄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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